‘역치를 찔렀더니…’ 암울한 기운 가득한 주제로 전시지평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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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치를 찔렀더니…’ 암울한 기운 가득한 주제로 전시지평 넓혔다
  • 원천보 전시기획자
  • 승인 2019.12.31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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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유혹하는 전시_ ‘실패, 이별, 취소’ 놀라운 박물관들

앱 만들어놓고 인화사업 집중한 ‘코닥’의 실패
‘비싼 불량품’ 오명 쓰고 철수한 ‘구글 글래스’
스웨덴서 실패박물관 개장, 결과는 성공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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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크로아티아서 선보인 ‘이별박물관’
베개·휴대전화 등 평범한 물건에 ‘절절한 사연’
“이별 뒤에 시시한 물건 없다” 감동·공감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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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멀: 이 전시는 취소됐습니다’ 뻔뻔한 제목
텅빈 공간에 사용신청 100여건… 방문객 ‘10만’
말리 멀 전시 열리지 않았지만 ‘프로젝트’ 인정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각의 이유가 있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 글을 전시로 옮긴다면 아마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실패박물관(Museum of Failure)’. 조직심리학자 사무엘 웨스트는 글로벌 회사들의 실패사례 100여개를 모아서 2017년 스웨덴 헬싱보리에 실패 박물관을 세웠다. 다음은 그가 모은 실패사례들이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디지털 카메라를 만든 ‘코닥(Kodak)’. 코닥은 인스타그램보다 훨씬 더 먼저 디지털 사진을 공유할 수 있는 앱을 개발했다. 하지만 정작 코닥은 디지털 부문을 적극적으로 사업화하지 않았다. 코닥의 전통 핵심사업인 인화서비스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구글(Google)’은 증감현실 디스플레이가 내장된 헤드셋인 ‘구글 글래스(Google Glass)’를 2012년 출시했다. 음성언어와 사용자의 동작을 인식해 작동할 수 있는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그러나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1500달러라는 비싼 가격은 물론 프로토타입에 가까운 상태로 출시하는 바람에 ‘비싼 불량품’처럼 인식됐다.

때로 실패는 혁신적인 제품을 낳는 도약점이 되기도 한다. 실패박물관 모습. 출처 = Penguin Vision Photography graphy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 ‘애플’도 성공만 거듭했던 건 아니다. 1993년 출시한 ‘애플 뉴턴(Apple Newton)’은 세계 최초의 개인용 단말기(PDA)였다. 기대를 모았지만 출시 당시 느리고 부정확한 필체 인식 탓에 만화영화 ‘심슨가족’에게 조롱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이쯤 되면, 실패박물관의 실패사례들이 단순히 멍청한 실패가 아님을 눈치챘을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의 선구자인 코닥은 2012년 파산했지만, 디지털 카메라 시대는 열렸다. 구글 글래스의 실패도 웨어러블 디바이스의 암울한 미래로 연결되지 않았다. 애플의 뉴턴은 검은 플라스틱 덩어리로 비난받았지만, 가장 위대한 혁신 중 하나인 아이폰으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사무엘 웨스트는 워싱턴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이 세상 80~90%의 혁신은 실패로 끝난다. 우리가 이 실패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배우는 것 뿐이다”라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이 분명한 주제에서 찾을 수 있는 전시품은 무궁무진하다. 전시의 핵심은 특정한 전시품이 아니라 ‘실패’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위대한 실패들’은 누적될 것이며, 각 나라의 투어 전시에서는 해당 국가의 제품들을 추가로 다룰 수도 있다. 전시 제작이 간단하기에 전시의 변형이 어렵지 않다. 상품을 쇼케이스에 올려 두고, 실패의 역사를 텍스트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실패를 보여주는 데 특별한 조명이나 화려한 인테리어는 필요없다. 당연히 제작비도 많이 들 이유가 없다. 실패박물관이라는 제목과 달리 전시사업은 성공적이다. 중국과 미국까지 전시를 확대하고, 지난 9월에는 이벤트 버전이긴 하지만 ‘스타트 업 서울’이란 국내 행사에서도 만나 볼 수 있었다.

(왼쪽 위) 실패담(쪽지)으로 가득한 방 출처 = 실패박물관 공식 인스타그램, 오른쪽과 아래는 이별박물관 전시물. 출처=brokenships.com

사별한 남편의 수저 등 기증품만 ‘3천점’
크로아·미국 상설전시장, 투어도시 30곳

사무엘 웨스트는 어떻게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을까. 그가 2016년 우연히 본 전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크로아티아의 ‘이별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이다. 실패박물관과 쌍둥이처럼 암울한 기운이 가득한 이름이다. 전시장 이름처럼 이별과 관련된 각종 아이템들과 사연이 같이 전시돼 있다. 전시물 자체는 너무 평범하다. 베개, 블라우스, 수저, 휴대전화 등이다. 너무 평범해서 버리거나 창고에 방치할 수준의 물건들이다.

그러나 특정한 단서를 달면 달라진다. 어머니가 임종 직전에 사용했던 베개, 남편이 세상을 떠나던 날 입었던 블라우스, 사별한 남편이 쓰던 수저, 사랑하는 사람과 나눈 문자가 가득한 휴대전화라면 말이다. 이 평범한 물건들에 절절한 사연들이 덧붙여지면 작은 돌멩이 하나도 감동적인 전시품이 될 수 있다. 사랑과 인연이 시작되고 무너지는 이야기 앞에서 시시한 물건이란 있을 수 없다. 이 공간은 ‘잠시라도 세상에 존재한 적 있는 모든 인연에게 바치는 공간’으로 소개되며 2006년에 처음 작은 콘테이너 박스에서 시작됐다.

평범한 물건에 사연이 덧붙여지면 특별한 감동을 주는 전시품이 된다. 출처 = brokenships.com 

시작은 기획자 본인과 그 연인의 물건들이었지만, 첫 전시 이후 갖가지 사연있는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지금은 3000점 넘는 기증품이 확보됐고 크로아티아와 미국에 각각 상설전시장을 설립했다. 이 전시의 투어도시도 30개가 넘는다.

2016년 제주 아라리오뮤지엄에선 한국 사연을 추가해 ‘82개의 이별이야기’가 전시됐다. 전시기획자인 조각가 드라젠 그루비시치는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녹아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며 헤어짐의 공유에 대한 의도를 밝혔다. 공식 홈페이지(brokenships.com)에 가면 기부자들의 전시품과 사연을 읽어 볼 수 있다.

혼자와서 춤추고, 텅빈 전시장 사진찍기도
“관객과 소통한 기념비적 사례로 남을 것”

전시업계엔 부정의 아이콘이 있다. 전시 제목은 ‘말리 멀: 이 전시는 취소됐습니다.(Marlie Mul: This exhibition is cancelled)’이다. 제목부터 무척 뻔뻔하다. 이 전시의 사연은 이렇다. 2017년 스코트랜드 글래스고 현대미술관(Glasgow Gallery of Modern Art)은 네덜란드 현대작가 ‘말리 멀’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건협의 과정에서 원만한 타협을 이끌어내지 못한 미술관은 전시 개막 직전 전시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미술관은 말리 멀과 상호합의 아래 전시가 취소됐다는 광고물을 남긴 채 빈 공간을 대중에게 그대로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홈페이지 공지글은 너무나 짧고 솔직해서 충격적일 정도다.

 

전시를 열려고 했지만 열 수 없었고,

 전시취소 광고물을 제외한 그 어떤 전시물도 현장에 없습니다.

다만, 전시기간 동안 관람객들은 전시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말리멀 : 이 전시는취소됐습니다’ 사진출처=더선데이포스트

전시기획자인 윌리엄 쿠퍼에 따르면, 이 공지를 홈페이지에 남기고 사용신청을 받았는데 100여건의 다양한 이벤트가 접수됐고, 5개월 동안 총 10만여명의 방문객이 다녀갔다고 한다. 어떤 관람객은 혼자 미술관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어떤 관람객은 텅빈 전시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좋았다는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이 대담하고 솔직한 선택은 다양한 결과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관객과 소통의 방식에서 기념비적인 사례로 남을 것이다. 말리 멀 전시는 열리지 않았지만 말리 멀 홈페이지에는 2017년 프로젝트로 취소된 이 전시가 게재돼 있다.

너무 흔해서 오히려 이색적이지 않은 주제들
전시 생기 불어넣은 비결은 ‘특별히 진솔해서’

이 사례들은 콘셉팅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콘셉팅은 평범한 물건을 특별한 전시품으로 둔갑시키고, 약점을 기회로 치환한다. 이 전시들은 제목만 접하면 기발한 이색전시로 보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실패, 이별, 취소’ 등을 기발한 소재라고 보기엔 우리 주변에 너무 흔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 전시들이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특별히 진솔해서’ 아닐까.

이른바 상업전시를 할 때 기획자들은 대부분 압박을 받는다.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특별한 것들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이다. 그 압박은 대부분 좀더 거대한 서사, 좀더 빛나는 비주얼 등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적절한 강조를 넘어선 ‘과장’은 현실과 괴리된 공허한 결과물을 만들 뿐이다. 때문에 출발점은 각각이 가지는 의미여야 한다. 그것이 주제를 만들고 관객과 진실한 소통할 수 있는 좋은 방식을 만들어 낸다. 최고의 사진가들에게만 허락된다는 세계적 명성의 퓰리처상 사진 부문을 받은 존 화이트의 작품은 의외로 소박하다. 기념비적인 사진들 사이에서 이런 평범한 사진이 수상을 했다는 것이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는 고작 시카고 사람들의 일상을 찍었을 뿐이었다. 여기 그의 인터뷰를 덧붙인다.

“제 사진은 신문 1면을 장식할만한 건 아니죠. 저는 그저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어요. 시카고의 악명 높은 주택공급 프로젝트 속에서 간신히 집을 얻어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나, 운동장이 없어 교실 복도를 뛰어야 했던 학생들의 이야기요. 그게 저에겐 ‘보이지 않는 영웅(unsung Hero)’의 이야기였습니다.”

어떤가. 저 아이들의 미소가 조금은 달라 보이지 않는가.

원천보 전시기획자
중앙일보 문화사업팀장(2001~2014), 모바일 기반 미디어기업 메이크어스의 이사를 지냈다. 전시콘텐츠기획사 빅피쉬씨엔엠 대표로 있다. ‘퓰리처상 사진展’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중앙미술대전’ 외 다수의 작품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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